백화도량 전북 완주 종남산 송광사
석가모니(Sakyamuni, BC 624-544)부처님께서 부다가야에서 연기를 깨달아 중도(팔정도)의 가르침으로 5비구를 교화한 이래, 불교의 역사적 전통이 가꾸어온 모든 사상과 문화, 제도 등은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송광사(대한불교조계종 제 17교구본사 금산사 말사)도 중도를 선양하기 위한 곳이다.
송광사는 백두대간이 남서쪽으로 기세 좋게 뻗어오다 더 이상 남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어선(終南), 전라북도 완주군 종남산 끝자락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송광사는 인조가 조선선종수사찰(朝鮮禪宗首寺刹)이라 사액한 사찰이다.
송광사 입구 일주문에 서면 일직선 상으로 금강문 천왕문 대웅전이 보인다.
일주문은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는 첫 관문으로 조선 중엽에 세운 것이다. 원래는 이곳에서부터 남쪽으로 3km 떨어진 ‘나드리’ 라는 곳에 있었으나, 절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점차 안쪽으로 옮겨지다가 1944년 해광(海光)스님이 이곳에 세웠다. 문의 좌우 측면에는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중심 기둥을 세우고,그 앞뒤에 연꽃을 조각한 보조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용머리 등으로 장식한 처마가 화려하며, 건물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멋을 풍긴다.
일주문에는 ‘입차문래자 막존지해(人此門來者 莫存知解)’ 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이 일주문을 들어오는 사람은 세속적인 생각,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한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여 불법(佛法)에 귀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일주문에는 자신이 간직한 불성(佛性)의 씨앗을 개발하여 스스로 부처의 길에 이르고 동시에 모든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야 한다는 대승불교 사상의 핵심인, 일불승(一佛乘) 사상이 담겨 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문의 좌우 측면에는 위아래의 굵기가 같은 중심 기둥을 세우고,그 앞뒤에 연꽃을 조각한 보조 기둥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용머리 등으로 장식한 처마가 화려하며, 건물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단아한 멋을 풍긴다.
송광사 경내로 들어가면서 일주문을 지나 그다음으로 만나는 이 금강문은 조선 후기에 지은 건물이다. 금강문은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부르며, 문 양쪽에는 손으로 권법(奉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抑) 또는 칼,창을 손에 든 금강역사(金剛刀士)를 모셨다. 왼쪽에는 밀적금강(密遊金剛),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邢羅延金剛)을 모셨는데,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아금강역사(阿金剛方士),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우금강역사(吘金剛方士) 라고도 부른다.
이 금강문을 지나면서 금강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쳐부수어 완전한 행복의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뜻이 있다. 금강문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이다.
금강문 양쪽에는 손으로 권법(奉法)을 짓거나 금강저(金剛抑) 또는 칼,창을 손에 든 금강역사(金剛刀士)를 모셨다.
송광사 천왕문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조각승 여인(呂仁)과 금산(金山)등이 인조 14년(1636)부터 13년에 걸쳐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위험에 빠지자 전국 여러 사찰에서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사천왕 신앙의 가피를 널리 구하였다. 사천왕은 지혜의 보검올 든 지국천왕이 동방세계를,불탑과 정법의 깃발을 든 광목천왕이 서방세계를,용과 여의주를 든 증장천왕이 남방세계를,비파를 든 다문천왕이 북방세계를 관장하면서 그곳 중생들의 선악업보를 면밀하게 살펴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을 정해준다.
사천왕상의 크기는 425cm이며,무인 같은 체형에 자비로운 보살의 용모와 형상을 하고 있다. 완주 송광사 소조 사천왕상은 검, 창, 용과 보주,깃발과 불탑을 손에 쥐고,악귀를 발로 짓누르는 사천왕상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송광사의 소조 사천왕상은 소조상의 제작 기법과 사천왕상의 신체적인 특징,균형감,조형성 등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사천왕상으로 평가된다.
1994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조사할 때 사리 보석 약재 등을 넣어두는 후령통과 사천왕상 조상에 참여한 시주자 명단, 다수의 고려 시대 목판본 경전,충지 등이 복장유물로 발견되었다.
천왕문에서 바라본 솽광사 대웅전
천왕문 뒤쪽의 현판
완주 송광사 종루는 십자형 평면 위에 다포 팔작지붕을 교차시켜 십자형으로 올린 2층 누각으로,이러한 구조는 국내에서 유일한 예이다. 송광사 종루가 언제 건축되었는가는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법당초창상층화주덕림』 1725에 송광사의 건축물로 ‘종각’이 언급되어 있고 이옥의 「사관」 에도 고루(큰북을 달아 놓은 누각)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임진왜란 이후 송광사를 중창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종루의 아래층은 모든 면이 지면에 닿아 있고 위층은 마룻바닥에 난간을 두르고 있다. 누각 중앙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위해 범종을 달았고,사방으로 돌출된 공간에는 수중 생명을 위한 목어,하늘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위한 운판,땅 위에 살고 있는 중생을 위한 법고 등을 달았다. 이 네 가지 법구를 가리켜 불전사물-빼이라고 하는데,세상의 모든 중생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하루에 세 번,새벽,정오,저녁에 울린다. 완주 송광사 종루는 전체적으로 부재가 작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한국 전통 목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힌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인 송광사 동종은 조선 숙종 42년(1716)에 만든 것으로 높이는 107cm,밑 너비는 72cm이다. 종 어깨 위 가장자리에는 작은 꽃잎무늬 장식을 줄지어 세우고,그 아래에 방패 모양 꽃무늬를 두었다. 그 밑에는 종의 둘레 휼 따라 구슬형 돌기 60개와 위아래를 구분하는 띠를 둘렀다. 아랫부분에는 작은 원 8개를 조각하고 원 안에 범(楚)자를 새겼으며. 그 아래에 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종의 밑자락에는 높이 6cm 정도의 덩굴 문양을 둘렀다.범종에 새긴 글로 보아이 종은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며 영조(1724〜1776) 때 고친 적이 있다.
송광사 극락전
송광사 지장전
송광사 지장전 안에 있는 소조지장보살삼존상 과 권속상일괄 불상들은 1640년에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지장전은 명부세계라는 지옥을 관장하는 십대 대왕과 명부세계의 구세주인 지장보살이 있어서 명부전(莫府殿)이라고도 부른다.
가운데에 있는 지장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서, 우리가 죽으면 우리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알려져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 미륵불이 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무불(無佛)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우고, 현재 도리천(忉利天)에 머물러 있다. 미혹함에 빠져 윤회의 세계에서 헤매는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 하려고 스스로의 성불(成佛)마저도 미룬 큰 자비심을 가진 분이기도 하다. 지장보살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그리고 10대 명왕,판관 금강밀직,동자상이 배치되어 있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은 송광사의 주불전으로 앞면 5칸,옆면 3칸, 9포 팔작지붕으로 된 단충 건물이 다. 승명 선사가 그 스승인 각성선사의 지도아래 1623년에 법당터를 마련하고 15년 동안 간고의 노력을기울여 1638년에 앞면 7칸, 옆면 5칸,2충규모의 불전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사세가 열악해져 원래의 웅장한 건물을 유지하지 못하고 1857년에 정일선사가 지금의 규모로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개축할 당시 대응전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위규 선사는, '비에 씻기고 바람에 갈리어 법당은 허물어지고, 날과 달이 감에 따라 불상은 빛이 변하여 검어졌다. 광경이 이렇게 처참함을 차마 볼 수 없다. 차라리 내 발이 닳아 없어지고 이 몸이 다 부서질지라도 이 법당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이 생을 그만두겠다.” 라고 썼다.
참담해진 기존의 대웅전을 해체하는 데에는 53명의 장인이 49일 동안 동원되었고,현재의 단충 불전으로 다시 고쳐짓는 데에는 7개월이 걸렸다. 당시 작업을 주도한 정일 선사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심정으로 공사를 마쳤다.”고 했다.
송광사 대웅전에는 소조 석가여래 등 삼존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삼존불 복장에서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삼존불 좌상은 청헌(淸憲) 법령(法令)등 조각승 17명이 4년여에 걸친 작업 끝에 인조 19년(1641)에 완성한 것으로,흙을 주 소재로 사용하였다. 중앙에는 석가모니불상이 봉안되어 있고 불상을 마주보고 섰을 때 오른쪽에는 약사여래불상이,왼쪽에는 아미타여래불상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형식의 삼존불상을 ‘삼세불’이라고 하는데,이는 중생의 고통과 불행이 있는 모든 곳에 부처가 상주하면서 정법으로 교화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석가모니불상의 복장에서는 삼존불상이 만들어진 내력을 소상히 기록한 「불상 조상기」 1641 와 불경,후령통(복장을 넣은 통) 등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불상 조상기」 에는 병자호란 이후 중국 심양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외적과 싸우다 전사한 이들의 명복을 빈다는 내용이 소상하게 담겨 있다. 특히 소현세자는 잠시 한양에 돌아왔을 때 송광사가 대웅전에 삼존좌상을 조상하고 개금을 하기 위해 금을 널리 화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심양에서 둔전을 개발하여 얻은 많은 이익금을 선뜻 내놓아 불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송광사 삼존불상은 565cm로 한국의 소조상 가운데 가장 크며 용모와 형상이 훌통하고 부드러운 법의 자락 등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소조 불상으로 평가된다.
송광사 대응전 삼존불상 사이에 있는 목조삼전패는 17세기에 만든 것으로, 이 삼전패는 목패(木牌), 원패(願牌)라고도 한다. 뒷면에는 각각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전하수천추(世子殿下壽千秋)’ 라고 적혀 있는데. 인조 임금과 왕비. 그리고 소현서세자. 봉림대군의 안녕을 빌어드린 조각이다.
인조는 병자호란을 맞아 어지러운 민심과 피폐해진 재정을 회복하고자. 최고 승병대장인 16도총섭 벽암 스님과 승병을 보내 송광사를 대대적으로 복원하고 이 절을 호국원찰로 삼았다. 연꽃과 구름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특히 왕을 상징하는 중앙 나무패에 있는 구름과 용이 뒤섞인 그림은 불교 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목조삼전패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이다
관음전
나한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십육나한 및 오백나한이 있다. 근래에 몇 차례 보수하면서 천정과 서까래 일부가 변형되었지만. 기본 구조와 부재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17세기 사찰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낮은 받침부 위에 커다란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위아래의 굵기가 같고 반듯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 벽에는 돌아가며 벽화를 그려 놓았으며, 전체적인 건물의 모습은 단정하고 균형이 잡혀 있다.
나한전에 있는 오백나한전 목조석가여래 삼존상 과 권속상일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2021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불상들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었다. 가운데에 석가여래를 두고 그 좌우에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배치하였다. 나한전 네 벽에 있는 오백나한은 남자 스님들로 오백상수(上首)라고도 한다. 이들은 석가여래의 제자로 아라한과(阿羅漢果)의 진리를 깨달아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하고, 윤회의 삶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도록 번뇌를 없애고 깨달음을 얻은 성자(聖者)들이다. 한동안 한국,중국, 일본에서는 오백나한 신앙이 성행했으며, 송광사 오백나한상은 금방이라도 중생의 비원을 들어줄 것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조각 기 법을 보여주고 있어 한국 나한상 중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삼성각
미륵불 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