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향교길 31-14 에 위치한 장수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대성전은 보물 272호로 1963년 1월 21일에 지정되었다.
장수향교 홍살문
외삼문 부강문
충효당
정충복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38호
정충복비는 장수읍의 향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조선시대 중기 사람인 정경손의 의로운 뜻을 기리고 있다.
정경손의 호는 충복으로, 임진왜란 당시 향교내의 문묘(文廟)를 지키고 있었는데, 왜적의 한 부대가 이곳 장수지역에 침입하여 문묘에까지 이르자, 문을 굳게 닫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말하기를,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들라”하였다. 이러한 그의 늠름하고 당당한 태도에 감복한 왜적들은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 :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로인해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으며, 대부분 불에 타버린 다른 지역의 향교들에 비해 이곳만은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의로운 기개를 거룩히 여겨 이 자리에 비를 세워 두었다,
비각안에 있는 비는 낮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헌종 12년(1846)에 세웠다.
내삼문
장수향교 대성전 보물 제272호(1963.01.21 지정)
장수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나라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지금의 자리로 옮긴 것은 숙종 12년(1686)때의 일이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께 제사지내기 위한 공간으로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며, 건물의 크기는 별로 크지 않고 앞면 가운데에는 여닫이문을 달았다. 오른쪽과 왼쪽 칸에도 같은 형식의 문짝 1개씩을 달았는데 그 옆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고 있는 장식구조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꾸몄는데, 이러한 장식은 조선 중기 이후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이다.
장수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는 서적은 지방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이다.
명륜당
경성제
진덕제
사마재
장수향교 홍살문
장수향교는 1407년(태종 7)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하였다. 1686년(숙종 12)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고, 1877년(고종 14)에 현감 홍우정(洪佑鼎)이 중수하였으며, 1935년에 중수하고 1970년·1973년·1975년에 각각 보수하였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대성전은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판본 90종 237책, 사본 32종 57책의 총 122종 294책이 있으며, 이 중 ≪청금록 靑衿錄≫·≪장수현도유안 長水縣都儒案≫·≪유안 儒案≫·≪수정향안 修正鄕案≫·≪향교조례 鄕校條例≫·≪선안 仙案≫·≪향헌 鄕憲≫ 등의 필사본은 이 지방의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