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의견공원과 의견관광지를 돌아본 후 오수의견비가 세워져 있는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공원으로 향했다.
오수의견비는 비각안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비로 , 위험에 빠진 주인을 구하고 의롭게 죽은 개가 발자국을 남기고 하늘로 승천하는 형태의 신비로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충견의 고장 오수를 상징하고 있다.
오수의견설화는 국민학교 국어교과서에도 오수에 대한 지명유래와 함께 실렸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의견상에는 오수의견유래, 오수의 개 형태제정, 의견상 설립취지 표지석이 있다.
의견상은 오수지명 유래담인 살신구주의 의로운 오수개를 본보기로 여기고 오수의 개 형태를 새로이 제정한에 있어, 이를 제15회 의견제를 맞이하여 동상으로 제작 건립하여 의견의 교훈을 길이길이 되새기고자 1999년 3월 설립했다.
1997년 4월 26일 오수의 개 기본형태가 제정되었는데 오수개는 "Tibetan mastiff"종의 혈통을 이어받아 한반도 남쪽에서 토착화된 것으로 그 형태는 귀는 축 처지고 꼬리는 치켜올라갔으며, 키는 60cm 정도이고 털이 길며 검정색 바탕에 눈 위 부분, 입 과 목 가슴 다리 등에 갈색에 섞여 있고 순한 얼굴에 날렵한 몸매를 지녔다고 했다.
의견비각 안내문에는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 비는 주인을 위해 죽은 오수개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높이는 218cm, 가로 96cm, 두께 28cm이다. 1928년경 전라선 개설 작업중에 오수면 상리마을에서 발견되어 1939년에 원동산으로옮겨졌으며, 1971년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비의 전면에 나타난 문양은 개가 뒤집혀 있는 형상인데, 마치 ‘주인을 구하고 의롭게 죽은 개가 발자국을 남기고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백비처럼 보이던 뒷면은 탁본을 통하여 약 120자 정도의. 글자를 판독하였고, 대시주, 금물대시주, 시주자 등의 명단 약 65명 이상이 확인된다. 또한 그 서체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유행한 육조체여서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 시대에 사용한 고식의 서법이라고 한다.
1254년에 간행된 보한집에 전하는 오수의견설화는 다음과 같다.‘거령현 사람 김개인(金蓋仁)이 기르던 충직하고 총명한 개가 어느 날 개인을 따라 밖에 나갔다가 개인이 취하여 풀밭에 누워 잠들었을 때 때마침 들불이 일어나 개인이 누워있는 곳까지 미치려 하자, 개가 근처 개울에 뛰어들어 몸을 적셔서 왔다갔다 하며 주위의 풀에 물기를 묻혀서 불길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기진맥진하여 죽고 말았다. 개인이 잠에서 깨어 이 상황을 보고 매우 상심하였다. 무덤을 만들고 지팡이를 꽂아 표시로 삼았으며 ‘견분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개를 추모하였다. 후에 무덤의 지팡이가 자라서 큰나무가 되 었다고 하여 그 지명을 ‘오수(獒樹)’라 불렀다고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남원부편에 기록된 이규보(1163~1241)의 시(詩)에 이미 ‘오수(契樹)’라는 지명이 확인되어 오수라는 지명과 오수의견설화는 1254년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전해진 것으로 이해된다.
오수의견비 안내문
의견비각 뒤로 보이는 충절의 상징, 임실 오수개의 넋을 기린 의견상과 그 환생목처럼 여겨져온 느티나무(느티나무는 보호수(임실군 지정 9-11-3)였으나 2011년 낙뢰를 맞고 고사하여 해제됐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원동산 옆쪽엔 비단실을 만들던 오수 제사공장 굴뚝이 남아있다.
의견비각 우측에 있는 비석군의 선정비는 관찰사 선정비 2기, 남원부사 선정비 3기, 오수 찰방 선정비 5기, 파비(破碑) 2기 등 인근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오수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수역참이 운영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라도 오수도(獒樹道)의 수부로서 문관 6품직 찰방이 부임하여, 11개 역 즉 남원의 동도, 응령, 창활역, 운봉의 인월역, 곡성의 지신역, 순천의 낙수, 양율역, 여수의 덕양역, 구례의 잔수역, 광양의 익신, 섬거역을 관할하였다.또한 오수는 임실, 순창, 남원, 장수를 잇는 교통으| 요지였기 때문에 사람과 물산이 풍부하였고, 이 때문에 오수도 일원에 관찰사 및 남원부사, 오수 찰방의 선정비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오수 원동산 선정비 안내문
원동산공원 입구 우측에는 두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오른쪽의 비석은 오수의 이야기를 고증하여 알린 동운 심병국 선생의 공적비이고 오른쪽은 1955년 4월 8일 의용소방대가 세운 오수고적기실비이다.
오수 원동산은 1919년 3월 23일~24일 오수만세운동이 시작된 곳이다.
이기승 선생은 오병용, 이만의, 이윤의 등과 함께 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으며, 군중에게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대하였다. 장일 시위 군중은 무려 2,000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이튿날가지 이어졌다.
구 오수역 앞 동산에 오수3·1독립운동기념탑 세워져 있다.